최종편집:2024-05-20 14:42:54

[기획특집] 안동의 전통사찰을 찾아서(9)

오도산 기슭 여행객이 쉬어가던 곳, 이천동 연미사(燕尾寺)
조덕수 기자 기자 / 입력 : 2019년 03월 30일
연미사 대웅전
연미사 대웅전
연미사 대웅전 석가삼존불
연미사 대웅전 석가삼존불
이천동 석불상(보물 제115호)
이천동 석불상(보물 제115호)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99호)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99호)
연미사 미륵전
연미사 미륵전

연미사(燕尾寺)는 안동시 이천동 제비원로 672번지에 있다.

안동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영주방면으로 3Km를 가면 한티재에 이른다. 이곳은 제비원 주유소와 휴게소가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한티재를 넘어 2Km 더 북쪽으로 가면 길가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마애불상을 만나게 된다. 이 불상이 바로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이천동 석불상이다. 제비원미륵불로 불리는 이 불상 뒤편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 연미사이다. 연미사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시대 때 여행객이 쉬어가는 숙소인 연비원(燕飛院)이 있었다하여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 연미사 석불을 제비 모양의 누()가 덮고 있었으며, 법당이 제비의 부리에 해당한다 하여 연미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에서 성주의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라는 사설에 나오듯이 우리 민족의 민속신앙의 정신적인 기둥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곳이다. <편집자 주>

연미사(燕尾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인 연미사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인 명덕(明德)634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며, 영가지(永嘉誌)에는 634년 건립한 후 두 차례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연비원이 있었다. 고려 때 불상의 머리가 떨어져 복원한 뒤 삼층석탑을 조성하고 법당을 중수하였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1918년 복원을 시작으로 1943년과 1947년에 중수하였다. 1950년 이후에 법당을 새로 세웠으며, 1978년 원래 정면 3, 측면 1칸인 대웅전을 정면 4, 측면 2칸으로 증축하였다.
연미사도 여느 사찰들과 다름없이 법공양과 4월 초파일 등의 불교 행사를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다. 연미사대웅전과 요사채로 구성되어 있다. 1978년 대웅전은 정면 4, 측면 2칸으로 증축하였고, 1986년 단청을 하였다.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요사채는 정면 4, 측면 2칸 규모이다.
연미사에는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 이천동 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된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安東泥川洞三層石塔)이 있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은 마애불로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다. 몸체와 머리가 각기 다른 돌로 되었는데, 몸체는 마애불처럼 새기고 머리는 조각한 특이한 모습이다.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안동 이천동 석불상 뒤에 위치하는데, 본래 무너진 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유래와 전설

연비원불사(燕飛院佛寺)는 부()서 북쪽 12리 떨어진 오도산(五圖山)남쪽에 있다. 큰 돌을 세워 불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0여 장()이다. 당나라 정관 8(634)에 만들었으며 여섯 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다. 집모양이 하늘에 날개를 펴는 듯하다. 뒤에 두 차례에 걸쳐 중창을 하였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의 재목은 모두 옛 것을 사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석불과 전각의 조성연대가 634(신라 선덕여왕 3)이며, 전각은 날아가는 새의 날개를 활짝 펼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후 두 차례 중창하였는데 기둥과 대들보 등의 제목은 옛 것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영가지가 편찬될 당시인 1608년에도 보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각의 이름은 없고 연미원불사라고만 기록하고 있어서 사찰의 이름은 이미 실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보덕법사(普德法師)에게는 11명의 높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무상화상은 제자 김취등과 함께 금동사를 세웠고, 적멸· 의등 두 법사는 진구사를 세웠고, 지수는 대승사를 세웠고, 수정은 유마사를 세웠고, 사대는 계육등과 함께 중대사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연구사는 바로 연미사를 가리킨다. 이것은 자세한 기록으로 전해오는 전설과 제비원 미륵불을 덮은 전각을 짓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기둥을 세운 흠과 주춧돌을 통하여 제비 모양의 누가 불상과 앞면 바위까지의 공간을 덮고 있어서 석굴사원 형식을 띠고 있었으며, 이 공간이 법당이었고 법당의 위치가 바로 제비의 부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찰의 이름이 연구사라 붙였다고 전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 보덕법사 외 11명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명덕이 634년에 불상을 새기고 연자루'라는 전각을 세워 연구사를 창건하였다. 불상을 덮고 있는 전각이 제비 모양과 흡사하여 연자루라 하였고,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가 제비꼬리 쪽에 있어서 연미사라 불렀으며 제비부리에 해당하는 곳에 법당이 있어서 연구사라 하였다.

연구사가 있는 산을 오도산이라 하였는데 오도는 불상, 연자루, 삼층석탑, 연미사, 소나무이며 이 다섯 가지가 조화 있게 어울려 그림같이 아름다운 산이란 뜻이다. 그러나 조선중기에 숭유억불정책으로 연구사는 폐사되기에 이르고 다만 석불만 남아있었다. 이 석불도 온전하게 본래의 모습을 보존하지 못하고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그 후에 머리 부분을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사찰의 이름도 실전되어 연비원불사로만 전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봉정사의 신도모임인 등촉계의 일원인 거사림(居士林)에서 연미사의 창건을 발의하여 옛터에 3칸 법당을 새로 신축하여 연미사라 칭하였으니 이때가 갑술년(1934)이었다.

해방이후 19475월 신도들의 시주에 의하여 칠성각 1칸을 새로 지었으니 이것도 새마을 운동 때의 1970년대 초에 무허가건물 철거령에 의거하여 철거되었고 1962년 요사채 1동이 신축되었다. 법당인 대웅전은 협소하여 1978년 증축하였는데 기존의 정면 3, 측면 1칸의 대웅전을 정면 4, 측면 2칸으로 증축하였고 1986년 단청을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연미사와 제비원 석불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燕(연) 처녀의 애화(哀話)
사찰이 위치한 지역을 제비원 이라고도 부르는데 ()'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을 말한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서울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다. 그 길목에 있던 것이 제비원이다.
제비원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이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연()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착하고 불심이 깊어 많은 사람들이 연이를 좋아했다. 이웃마을에 김씨 성의 부자가 살았는데, 집은 부유했지만 마음씨는 나빠 다른 사람을 도울 줄 몰랐다. 이 집의 총각이 비명으로 죽어 저승에 가게 됐다. 염라대왕은 연이의 선행을 빌려 쓰고 세상에 나가 인정을 베풀라 했다. 김씨 총각은 이승으로 돌아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의 재물을 나눠줬다.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다. 큰 법당을 짓느라 5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마지막 날 기와를 덮던 와공이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졌다. 높은 지붕에서 떨어진 와공의 몸이 마치 기왓장처럼 산산조각이 났는데, 그 순간 와공의 혼이 제비가 돼 날아갔다고 한다. 이 절을 제비사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를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 부르게 됐다.
연이는 38세가 되던 해 동짓달 스무사흗날에 죽었는데, 그날 저녁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연이의 혼이 이 돌부처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이 부처를 미륵불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다.
미륵불의 목을 벤 이여송
제비원의 미륵불 머리 부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한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청병으로 명나라에서 온 이여송(李如松)은 난이 평정되자 우리나라의 훌륭한 인물이 날 자리를 찾아 혈을 끊고 다녔다. 이여송이 제비원 앞을 지날 때 말이 나아가지 않자 칼로 미륵불의 목을 쳤다.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아직까지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 자국이 있다. 한 스님이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목을 제자리에 놓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 모양으로 볼록하게 나오게 다듬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보면 이은 자리는 마치 염주를 목에 걸어 둔 것 같아 보인다.

제비원 미륵불을 조각한 형제

옛날 어떤 형제가 일세(一世)에 뛰어난 조각가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형제는 서로 뒤질세라 늘 쉬지 않고 조각가가 하는 일을 계속하던 중 문득 일세에 제일가는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형제 가운데 어느 한쪽이 당대 제일의 조각가가 된다면 다른 한쪽은 상대적으로 둘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는 의논한 결과 서로 당대 제일의 조각가 되려고 하니, 필시 하나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서로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은 죽기로 하였다. 내기는 미륵불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기가 시작되자 동생은 훌륭한 미륵불을 만들려고 열심히 돌을 갈고 다듬었으나 형은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약속한 날이 되자 그날까지 동생은 미륵불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형은 미륵의 머리만 조각해서 바위 위에 얹어 훌륭한 불상을 만들었다. 동생은 내기에 진 까닭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생이 만든 조각은 개천가에 굴러다닌다고 한다. 지금 제비원 미륵불상의 목 부분을 보면 이어서 만든 흔적이 있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이는 형이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붙였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오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연미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1동으로 구성된 작은 사찰이다. 연미사는 대웅전이 정면 3, 측면 1칸의 규모였으나 협소하여 1978년에 증축하여 정면 4, 측면 2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대웅전 옆에 칠성각이 정면 1, 측면 1칸의 크기로 있었으나 70년대 초 새마을운동으로 무허가 건물 철거령에 의거하여 철거된 후 다시 짓지 못하고 있다. 요사채는 대웅전 우측에 정면 4, 측면 2칸의 크기이며 신도들이 사용한다. 건축물의 건립연대가 오래되지 않았고 특징적인 양식을 갖춘 것도 아니어서 간단하게 언급한다.

대웅전은 시멘트로 미장한 기단위에 각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며 3량 가구이다. 정면 4, 우측면 2, 좌측면 1칸에는 금판이 있는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정면 4칸 중 우측 1칸은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3칸이 법당이다. 법당 내부에는 정면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불단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측에 산중탱화와 우측에 칠성탱화, 산신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산중탱화는 가로 68Cm, 세로 124Cm 크기이며 광서 6(1880, 고종 17)경신 428일에 제작한 것이다. 칠성탱화는 가로 182Cm, 세로 122Cm, 크기이다. 산신탱화는 가로 90Cm, 세로 122Cm 크기이며 모두 근래작품이다. 석가모니불은 높이 120Cm 정도이며 뒤에는 가로 182Cm, 세로 122Cm, 크기인 후불탱화가 봉인되어 있다. 불구로는 지름 36Cm, 높이 65Cm인 소종 1점이 있다.

대웅전은 1978년 증축되었고 단청은 1586년에 하였다. 대웅전의 우측에 있는 요사채는 정면 4, 측면 1칸의 크기이며 향집이다. 구조는 북측에서부터 부엌방, , 방의 형태이며, 정면 3칸과 우측면 1칸에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소장문화재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泥川洞 磨崖如來立像)
경북 안동시 이천동 산2번지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은 1963121일 보물 제115호로 지정됐다. 자연암벽에 불신(佛身)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 높이 2.43m, 전체높이 12.38m의 석불을 조각했다. 전체 높이 12.38m의 거구의 불상이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도 이와 거의 같은 수법을 보여준다.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됐으나 얼굴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스럽다. 특히 입술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돼었다고 보고 있다. 삼도(三道)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법의(法衣) 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돼 있다. 왼손은 가슴높이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임을 알 수 있다. 대좌(臺座)는 불상의 발아래에 음각한 단판연화문으로 구성했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석탑이며 높이는 약 3m이다. 이 탑은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이천동석불상 후방의 암벽 위에 있는 단성기단(單成基壇)의 일반형 삼층석탑으로 기단부와 신부(身部)의 구성 비례가 맞지 않아 부조화를 이뤄 원재(原材)가 아닌 타부재(他部材)가 섞여 있지 않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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