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4-05-20 05:48:08

연필을 깎으며


세명일보 기자 / 입력 : 2018년 04월 10일

책상에 앉아 연필을 깎는다. 책상에 앉으면 노트를 펼치고 필통에서 연필과 칼부터 꺼내드는 게 오랜 버릇이다. 선물받은 고급 볼펜과 만년필이 있지만 서랍 속에서 잠잔 지 오래다. 정확히 언제부터인가는 모르겠는데 나는 연필이 참 좋다. 어느 회의나 세미나를 가도 주최 측이 내놓은 연필만은 챙겨온다. 연필에 칼을 댄다. 사각사각 뽀얀 나뭇결이 드러나며 연필밥이 동그랗게 말린다. 미세한 나무향이 풍겨온다. 깎인 부위와의 경계에 피어난 손톱 같은 칼자국은 둘레와 길이가 균등해야만 마음이 안정된다. 드디어 칼날이 연필심을 살짝살짝 벼린다. 금속과 흑연의 한판 대결, 그 떨리는 손맛이 나는 좋다. 너무 힘을 주면 심이 패거나 가늘어진다. 엄지가 적당한 압력으로 부드럽게 칼등을 밀어주어야 연필심은 굵기와 길이가 아름답게 빛난다. 소소한 행복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은뱅이 책상을 끌어와 숙제를 하노라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곁에서 연필을 깎아 주셨다. 어린 눈에 아버지의 연필 깎는 솜씨는 최고였다. 어두운 전등 아래서도 마치 기계로 깎은 듯 질서정연하고 정갈했다. 그 시절 연필은 품질이 떨어졌다. 나뭇결마다 단단함이 다르고 심이 물러서 칼이 리듬을 못 타면 나무는 푹푹 잘려나가고 촉은 울퉁불퉁해졌다. 심의 점도는 약해서 침을 묻혀가며 글씨를 썼다. 만화가 그려진 외제나 향나무 냄새가 풍겨오는 고급 연필을 쓰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아버지는 연필 쥐는 법부터 깎는 법, 몽당연필을 늘려 오래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미국 만화가 데이비드 리스라는 사람이 쓴 ‘연필 깎기의 정석’(2013년 국내 출간)이란 책이 있다. 세상에 할 일이 그리 없어서 연필 깎는 기술을 연마했을까. 시대착오적이고 하찮게 보이는 기술이지만 그는 매우 진지하다. 책을 읽다보면 가장 보잘 것 없는 일이 때로는 가장 심오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 삶에서 연필 한 자루 완벽하게 깎는 것조차 기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물론 연필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 지금도 컴퓨터 모니터를 원고지 삼아, 손가락과 키보드를 연필 삼아 이 글을 쓴다. 원고지에 글을 쓰면 보내기도 어렵고 받는 사람도 난감할 테니. 하지만 책상에는 오랜 기간 애호한 브랜드의 연필 몇 자루와 노트가 자리잡고 있다. 컴퓨터를 켜기 전, 천천히 연필을 깎는 행위는 흐트러진 마음과 자세를 작업 모드로 변환시키는 나만의 준비동작이자 경건한 의식이자 짧은 몇 분의 명상이다. 그게 없으면 글이 안 나간다. 뾰족해진 연필로 글의 소재나 꼭 쓰고 싶은 단어, 글 구성을 이것저것 노트에 써놓고 나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생각이 떠오르면 또 연필을 들어 메모를 한다. 글 노트에 낙서도 하고 줄도 긋고 중요 표시도 하고 동그라미도 친다. 모니터와 키보드에는 연필과 공책이 주는 그런 여백과 섬세함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연필을 애호하는 사람이 무조건 좋다. 지인의 사무실에 갔을 때, 데스크탑 옆에 몰스킨 다이어리가 있고 그 위에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파버카스텔 연필 몇 자루와 지우개가 무심히 놓여있으면 그 사람이 왠지 다시 보인다. 날카로운 심을 보호하는 멋진 포인트 가드까지 덧씌워있다면 더 좋다. 아, 이 사람도 나처럼 연필을 사랑하는구나, 내 부류구나, 연필 한 자루가 동질감과 유대감을 준다.연필 예찬을 해본다. 연필은 가장 저렴한 필기구다. 동아연필 문화연필 모나미 같은 평범한 국내산 연필 한 다스는 1000원~2000원이다. 외국의 명품 브랜드로 꼽히는 블랙윙이나 파버카스텔, 스테들러의 마스루모그래프, 스위스우드의 카렌다쉬. 포르투갈의 비아르쿠, 체코의 코이누르 같은 브랜드는 한 다스가 2만~3만 원 선이다. 자루 당 2000원 언저리다. 하지만 작은 사치에 비해 그 호사감은 크다.  연필은 금속이나 플라스틱성의 만년필이나 볼펜이나 샤프처럼 차갑지 않다. 나무를 쥐면 어린 시절과 아련히 연결되어진 따스한 느낌이 든다. 연필은 오감이다. 하얀 종이에 연필로 글을 써내려갈 때는 오감이 확장된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내는 거 같다. 명품 연필과 질 좋은 종이가 마찰하며 내는 마른 낙엽 스치는 듯한 소리, 연필을 따라 올라오는 삼나무나 향나무의 아련한 향, 손에 쥐었을 때의 부드러운 단단함….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촉각이 조화를 부리며 얼음처럼 굳은 머리를 서서히 녹인다. 연필은 쓰고 지울 수 있어서 사적이다. 그래서 은밀하다. 평생 지운 게 많다. 수없이 고뇌하고 후회한 내 삶과 생각의 궤적을 아는 놈이다. 사실 꼭 연필이 아니어도 좋다. 나에게 맞는 최고의 필기도구를 만난다는 건, 어쩌면 일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선택이다. 어떤 물건은 때로 필요성보다 감성적 가치로 존재한다. 그래서 펜과 종이의 효용가치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연필과 만년필이나 다이어리 같은 아날로그 필기류가 여전히 팔린다. 전구가 발명되었어도 양초는 사라지지 않았고, 음원의 시대에도 레코드판은 살아남았다.
연필의 소명은 소멸이다. 연필은 다른 필기구와 달리 흔적 없이 소진된다. 삶의 길이가 세월의 파도에 부딪쳐 조금씩 짧아지며 소멸되어 가듯, 연필은 우리 삶과 닮았다.

▲ 한 기 봉 /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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