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경력 52년에 발표한 시가 2천여편이나 되고, 발간시집이 4여권이 되고, 무게있는 감칠맛 나는 시(詩)가 200여편을 헤아리니 그 누구도 나를 문학적으로 깔볼 수 없는 천병만마(千兵萬馬)를 거느리고 있다. 일제시대 시인을 보면, 쓸만한 시(詩)가 한편도 없는 이름뿐인 죽정이 시인도 흔하고 숱하다. 일제시대에 살았던 시(詩) 못쓰는 시인을 실력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쓸만한 시(詩)가 오지게 많은 현존하는 생존시인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억수로 많다. 현존하는 시를 외국어(영?불?미)로 번역하여 세계에 보급한다면 이 땅의 시인판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지난 날 필자(나)는 참여시(저항시)의 주요시인으로 자타공인했지만, 지금은 참여시(풍자시) 뿐 아니라, 서정시에도 확고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 특히 단시(短時)의 명장(名匠?名將)이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 터이다. 감명깊은 시(詩)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늘 고마움을 느끼고 산다. 워낙 많은 시적(詩的) 자산(資産)을 지니고 살다보니, 오랜만에 만나 더욱 낯선 내 시(詩)에 감동을 먹을 때도 많다. 지금 소개하는 ‘역설시초(逆說詩抄)’도 그렇다. ‘역설시초’는 원고청탁도 받지 않고, 임의로 월간조선에 보냈지만 청탁시보다 우선 취급해주신 당시 월간조선 문예담당자 기자님께 신선한 감명을 느꼈다. ‘역설시초(逆說詩抄)’가 태어난 것은 전두환 대통령 집권초기로 언론자유의 제약도 컸던 시대였다.
역설시초(逆說詩抄) 김시종 어떤 여자가 내 꿈에 무단출연했는데, 나는 그 여자에게 입장료를 받아야 합니까? 출연료를 주어야 합니까? 마당에 보도블럭을 깔고 나서, 비가 와도 마당이 젖지 않는다. 마당에 보도블럭을 깐 뒤부터 비가 안 와도 본래의 흙은 늘 젖어 있다. 화장실 휴지통에 버려진, 자유의 여신상을 주웠다.
여신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지만, 조그만 칙간의 어둠도 밝히지 못했다.
첫번 받은 戀書처럼 품에 지닌 女神像! 내 가슴의 無明을 밝혀 준다. (월간조선 1982년 10월호) 역설시초(逆說詩抄) 은 필자(나)가 겪는 실화다. 그 누구보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가졌던 나는 불여의한 정치현실에 대해 통탄을 안고 살았다. 자유는 참으로 소중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가치라고 확신한다. (2018년 5월 9일 16시 14분) ▲ 김 시 종 시인 /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