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문경의 특색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산고수장(山高水長)의 자연환경이 제대로 보전된 삼삼한 지역이다. 문경엔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산인 주흘산(主屹山?1106m), 백화산(白華山?1063m) 등 해발 1천m가 넘는 산이 여섯 개나 되고, 길이 40Km가 넘는 긴 하천이 둘이나 된다. 영강(穎江?66.2Km), 금천(錦川?42Km)이 문경 땅을 풍요롭게 적셔주는 젖줄이다. 문경의 주봉(主峰)인 주흘산의 산 이름은 고구려식 표기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오늘날 문경으로 불려지기까지 몇 차례 지명이 바뀌었다. 문경의 맨 처음 이름은 고사갈이(古思葛伊)였다. ‘고사갈이’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1990년 초애 필자가 확실하게 그 뜻을 풀었는데, 아직 그 졸견(拙見)에 맞서는 사람이 없다. ‘고사갈이성’ 다음에 관산(冠山)이라 한데서 ‘고사갈이성’의 뜻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주흘산의 모습은, 평지에서 보면 고깔같이 생겼다. ‘고사갈이’는 ‘곳갈이’의 이두식 표현이다. ‘곳갈이’가 관산(冠山), 관문(冠文), 문희(聞喜)를 거쳐 오늘날의 문경(聞慶)으로 되었다. 문경엔 경상도 사투리가 별로 없다. 이우릿재(이화령)을 넘으면 충북 괴산군 연풍이다. 이우릿재를 넘어 문경 사람들과 연풍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사투리가 많이 완화되어 문경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둥지를 틀 수 없었다. 필자는 경상도 말 중에 문경 말이 서울 표준말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문경에서 태어나 77세가 되도록 이곳에서만 줄곧 살아온 필자가 깨친 바로는, 문경 사람들은 지방색이 없다. 외지에서 문경으로 이사와서 사는 사람들에게 텃세를 부리는 법이 전혀 없다. 문경의 이웃 고장은 텃세가 세서 외지 사람들이 파고 들어가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문경시에는 토박이보다 외지인들이 이사해 와서 많이 살고 있다. 문경 사람들이 텃세를 부리지 않고, 지역색이 없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문경은 행정구역이 경상북도에 속하지만, 결코 신라의 텃밭이 아니었다. 문경은 삼국시대 때는 백제?고구려?신라의 지배를 골고루 거친, 3국 세력이 충돌하던 ‘점이지대’였다. 문경의 사찰인 김룡사, 대승사를 세운 승려들이 모두 고구려의 승려라는 사실은 이곳이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임을 알려준다. 온 국민이 첫손가락으로 꼽는 전국제일의 명승지, 문경새재의 이름도 따져봐야 한다. 새재를 고려시대 때는 초점(草店)이라 했다. 초점(草店)이란 ‘억새풀 고개’란 뜻이다. 조선시대 때는 초점이 조령(鳥嶺)으로 바뀌었다. 새재(642m)란 너무 높아서 새도 날기 어려워 ‘새재’라고 부른다 하니, 그 익살스러움을 보자면 하품이 날 소리다. 북한에는 2천m가 넘는 높은 고개가 꽤나 많다. 문경새재는 새(鳥)와는 관계가 없고, 새(草)와 직결된다. 지금도 새재에는 풀과 관계있는 지명이 많다. 푸실(草谷), 상초(上草), 하초(下草), 중초(中草), 초곡천(草谷川)이 있는 것만 봐도, 새재는 ‘억새풀 고개’임이 확실하다. 지금은 전국 제일의 관광명소로 각광받는 문경이지만, 왕년의 문경은 한국 산업경제의 원동력 구실을 수행했다. 1980년 말에 문경에서 생산한 무연탄은 연간 200만t으로 전국 생산량의 11%를 차지했다. 문경 시멘트 공장은 1957년에 준공되어 연간 30만t의 시멘트를 전국에 공급하며 6?25 동란으로 파괴된 우리나라를 재건했다. 지난날이나, 지금이나 문경은 이 땅의 보배임을 알 수 있다. 문경 시멘트 공장은 문을 연지 60년만에 지난 2018년 5월초 문을 아주 닫았지만, 국토재건과 건설에 이바지한 공은 청사(역사)에 영원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