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이 무더위에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의 대모이신 조마리아 여사가 생각난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의 요즘 같은 폭염에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지병을 얻어 향년 66세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하얼빈역 의거 후 재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에게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며 사해를 품은 듯한 기개를 가진 분이셨던 조마리아 여사. 1862년 황해도 해주군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같은 지역의 명문가 집안 동갑내기 안태훈 선생(1862~1905)과 결혼한 후 슬하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도록 키워냈던 분이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그리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조마리아 여사는 평생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면서도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조마리아 여사가 ‘여중군자(女中君子)’, ‘여걸(女傑)’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던 사건은 바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거사 후 있었던 재판과정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총알 3개로 현장에서 처단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운동을 벌이던 중국의 혁명가들로부터도 큰 찬사를 받았고, 더 나아가 일제의 한국침략을 주시하던 서구 열강의 주목을 끌기에도 충분한 일대사건이었다. 그 후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조마리아 여사는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의 안중근 의사 재판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하는 한 편으로, 죽음을 앞둔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용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 얼마나 눈물겨운 결단인가. 어느 부모가 본인보다 자식이 일찍 죽기를 원하겠는가? 당시의 유교사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나라를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당부는 요즘 생각해도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담력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일제의 서슬 퍼런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슬하의 자제들과 며느리, 손주 등 10여 명이 넘는 가족을 이끌고 연해주로, 만주로, 북경으로, 그리고 상해로 다니면서 온 가족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평생을 바쳤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대모 곽낙원 여사(김구 어머니)와도 합심하여 상해 독립운동 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음은 만천하가 다 아는 일이고···. 일찍이 조마리아 여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이 극에 달한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의 제2차 의연활동에서 가족들을 이끌고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납부하였던 구국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간 자식들에 가려져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은 잘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이 아프리카보다 더한 날씨에 잠시나마 조마리아 여사를 생각하면서 찜통더위를 극복해 갔으면 한다. 조마리아 여사는 한국 여성독립운동가의 전범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기에···. ▲ 김 지 욱 /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