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아마 지금처럼 뙤약볕이 내려쬐는 한여름이었을 1909년 8월에 함남 덕원군에서 태어난 최용신(崔容信, 1909-1935)은, 아시다시피 심훈의 대표적인 소설 『상록수』 속의 주인공 채영신과 동일 인물이다. 당시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과 주인공들의 애정을 적절하게 결합했다는 특징이 있는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채영신은 실존 인물에서 나왔던 것이다. 1994년 안산의 뜻있는 지역민들이 실제 인물 최용신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청원하러 갔을 때 접수처 직원이 물었다. “아니, 왜 소설 속 주인공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십니까?” 그 후로 신청자들은 소설 『상록수』 속 채영신이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웃지 못 할 사연이 있는 신여성 최용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감리교 신자였던 최용신 선생은 원산시의 루씨여자보통학교를 거쳐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농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을 정도였다. 1928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조선일보』 (1928. 4. 1. ‘교문에서 농촌에’ 중에서)에 기고할 정도이니 그 깨우침 정도는 이미 선각자다웠다고 하겠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중등교육을 받는 우리들의 책임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등교육을 받고 나아가는 우리는 화려한 도시의 생활만 동경하고 안락한 처지만 꿈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하려는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그 후 협성여자신학교 농촌과에 재학 중 1929년 여름방학 때 황해도 수안군에서 첫 봉사활동을 하면서 현지 활동을 통해 가난과 무지가 만연한 농촌의 현실을 보게 되었고, 깊은 좌절을 한 후 학업을 중단하고 비로소 농촌운동에 확실히 전념을 하게 되었다. 당시 농촌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최 선생은 부모들을 설득하여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왔다. 또한 한글과 성경을 가르치고, 수예, 재봉, 가사 등 실용적인 기술들도 가르쳤다. 선생의 노력 덕에 농촌은 점점 더 개선되고 발전되었고, 가난과 무지 속에 살던 농촌 주민들은 계몽되었다. 당시의 모습을 심훈 『상록수』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아침 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그 종소리는 저희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어두운 귀와 혼몽이 든 잠을 깨워 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 울리겠지요.” 그래서 선생은 자신만의 영달을 버리고 식민지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했다. 최 선생은 처녀의 몸으로 당시로서는 새소리밖에 안 들리는 오지였던 샘골 마을에 들어와 무지한 농민들과 동고동락 하면서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쳤던 것이다. 최용신 선생의 노력으로 마을의 안정과 기반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아갈 때, 선생은 더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선생은 1934년에 일본 고베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공부하던 중 별안간 각기병에 걸리어 급히 귀국하게 되었고, 샘골에서 휴양하면서 농촌교육을 계속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YWCA가 보조금 지원 중단을 선언하면서 선생은 경제적인 부담을 안게 되었고,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35년 1월 장중첩으로 그만 병사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상록수』라는 이 소설이 나오던 해에 선생은 과로로 인하여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둔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생은 끝까지 샘골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대일항쟁기의 암울한 시대에 26살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여성의 몸으로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적 활동을 했던 소설 속 인물 채영신과 실제 인물 최용신 선생을 함께 그리워해 본다. ▲ 김 지 욱 /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