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교육을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 예찬했던고? 필자는 교원생활 37년반에 꿈에도 잊지 못 할 애틋한 사연이 두 건이 있다. 내가 학급 담임을 한 학생은 아니지만 중?고등학교 교사는 학과지도를 하는 학생들은 직계제자라고 봐야 한다. 먼저 C.Y.S이는 필자가 1970년 3월 1일부터, 1971년 2월 28일까지 가은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자다. 필자는 C.Y.S 양(당시 3학년 3반 부실장)에게 사회(공민)과 작문(국어)를 가르쳤다. C.Y.S양은 학업도 뛰어나고 성격도 발랄하고, 시를 잘 지어 교내 백일장에 입상하여 상도 받고, 한 마디로 장래가 촉망되는 꿈나무였다. 인생의 앞 날을 누가 알 수 있으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졸업식을 일주일 앞두고, C.Y.S양이 가출을 하고, 무단결석을 했다. 알고보니 이유는 너무 단순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시 200원밖에 안되는 앨범대금(졸업사진)을 써버리고, 학급담임(3-3 J여교사)가 앨범대금 독촉(독려)하자, 제물에 놀라 가출(家出)을 하고, 그 날 곧바로 색주가에 투신하여 쉽사리 신세(앞길)을 망치게 됐다. 사제(師弟)사이에 정보를 너무 몰랐던 것이 불행을 막지 못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되고 말았다. 당시 200원(앨범값)은 얼만큼의 가치였는가? 돼지고기 한근(600g)에 150원이었다. 그 정도의 푼돈이라면, 필자가 대납(代納)해 줄 수 있는데, 정보소통이 없어 불행을 막지 못했는데,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C.Y.S양은 기지촌의 양공주가 되어 흑인병사와 결혼하여 도미했다가 환향하여 국내에 살면서, 가은중학교 동기동창회에 참석하여 내 안부를 잊지 않고 묻는다하니, 지난 날의 불찰이 더욱 안타깝다. C.Y.S양아, 지난 날을 원망하지 않고 오늘을 밝게(긍정적) 사니, 자네야 말로 승리한 인생이라고 격려하고 싶다. 제 2화(둘째 이야기)는 1985년 문경읍소재 문경고등학교에 상담부장교사를 하던 시절 이야기다. B.Y.D군은 당시 문경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가장 촉망받던 학생이다. 평소 필자는 B.Y.D군에게 연말(1985년 12월)에 입학원서를 낼 때, 반드시 서울대학교와 세무대학에 원서를 같이 내라고 강조(강권)했다. 세무대학은 특차대학이었기 때문에, 서울대학교와 같이 원서를 내도, 이중지원이 되지 않았다. B.Y.D군이 대학입시원서를 내기 직전에 K도교육청에서 내는 편찬물의 교정위원으로 위촉되어, 장기출장을 가고 말았다. 학교에 돌아오니, B.Y.D군은 서울대학교 낙방생이 되어 있었다. 학급담임 N교사가 원서작성을 신중하게 하지 못하고 1지망보다 2지망에 점수가 높은 과를 적어 2차도 자동으로 탈락을 하게 되었다. 필자가 신신당부하던 세무대학원서는 아예 제출조차 하지 않았다. 천애의 낙방생으로 전락한 B.Y.D군은 가까스로 한양대학교 법학과에 지망하여, 반장학생이 되었다. 가정이 극빈하던 B.Y.D군은 대학 한 학기를 마치고, 군에 지원 입대 했다. 한 쪽 발목이 부실하던 B.Y.D군이 하필 강훈련의 대명사인 공수특전단에 부대배치를 받아, 견뎌낼 수 없을 정도의 맹훈련에 후달렸다. B.Y.D군이 보내준 군사우편 편지를 필자는 정성을 기울여 답장을 100% 보내줬다. 필자도 지난 날 군복무시절에 고향에서 오는 편지가 반가웠음을 너무나 뜨겁게 느꼈기 때문이다. 필자와 B.Y.D군의 편지는 의좋게 오갔다. 얼마 뒤엔 B.Y.D군의 편지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무척 궁금했지만 당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몇 년 후 알게 되었지만, 그 때 B.Y.D군은 맹훈련에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탈영을 하게 됐고, 이내 붙잡혀 인생재생창이란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이 되었다. B.Y.D군의 후일담은 전혀 듣지 못했다. 담임교사의 원서작정실수가 유망주던 B.Y.D군의 인생을 못 쓰게 만들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최대의 행운이다. B.Y.D군이여! N교사를 원망하지 말고, 망가진 인생을 수습하여 바르고 밝은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 김 시 종 시인 /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