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07-31 02:03:16

'전략적 모호성' 꿈을 품고 바보처럼 산다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김경태 기자 / 2318호입력 : 2026년 05월 22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URL복사

국제 정치와 기업 협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다. 이는 자신의 의도와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상황 변화에 따라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는 전략을 뜻한다. 겉으로는 애매하고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긴장시키고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계산된 침묵과 거리두기다. 이 개념은 냉전 시기 외교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널리 쓰였다. 특히 미국이 대만 문제에 대한 방어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세계 외교 용어로 정착했다. 미국은 중국의 무력 행동을 억제하면서도 대만의 독립 선언 역시 자제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명확한 답을 피했다. 이것이 바로 전략적 모호성의 대표 사례다.

기업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세계적 IT 기업은 인수합병 협상에서 최종 의사를 끝까지 공개하지 않는다. 협상 상대에게 계속 거래할 수도, 철수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남겨 가격과 조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다. 노사 협상에서도 기업은 구조조정 규모를 즉시 공개하지 않고 여론과 시장 반응을 살핀다. 정치권 역시 선거를 앞두고 민감한 정책에 대해 일부러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다. 찬성과 반대 편을 동시에 잃지 않으려는 계산이다. 

전략적 모호성의 장점은 첫째, 선택의 폭을 넓힌다. 상황이 급변할 때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둘째, 불필요한 충돌을 줄인다. 명확한 선언은 상대의 즉각적 반발을 부르지만, 모호성은 타협의 시간을 벌어준다. 셋째, 협상력을 높인다. 상대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쉽게 압박하지 못한다.

외교학자 헨리 키신저 역시 협상에서 "모든 카드를 너무 빨리 공개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단점도 크다. 지나친 모호성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원칙 없는 태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에서는 우유부단함이 오판을 부르기도 한다. 상대가 결국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면 오히려 도발을 택할 수 있다. 기업에서도 애매한 의사결정은 조직 혼란을 낳는다. 직원은 방향을 모르고 시장은 불안을 느낀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눈치만 보는 사람은 배려심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기보다 책임을 회피하는 기회주의자로 보이기 쉽다.

반면 사려 깊은 모호성은 갈등을 줄이는 지혜가 되기도 한다. 모든 말을 즉시 직설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상대의 체면과 감정을 고려한 여백의 언어는 관계를 오래 가게 만든다. 동양의 전통 외교와 유교 문화에서도 말을 아끼는 지혜를 미덕으로 보았다. 문제는 왜 모호한가에 있다. 공동체 안정과 배려를 위한 모호성은 지혜가 되지만, 책임 회피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모호성은 비겁한 처세가 된다. 결국 전략적 모호성의 핵심은 타이밍이다. 모호해야 할 때와 결단해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실패한다. 지나치게 빨리 입장을 드러내면 협상력을 잃고, 끝까지 애매하면 신뢰를 잃는다.

역사는 결단의 순간을 놓친 지도자와 기업의 몰락 사례로 가득하다. 모호성은 영원한 전략이 아니라 결단을 준비하는 잠정적 공간이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리더십은 애매함 자체에 있지 않다. 필요한 순간에는 침묵할 줄 알고, 결정적 순간에는 분명히 말할 줄 아는 데 있다. 전략적 모호성의 지혜는 끝까지 숨기는 기술이 아니라 때를 놓치지 않는 판단력에 있는 것이다. 기업 경영이나 학교 운영에서는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손해를 보는 수도 있지만 모호성으로 시기를 놓쳐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다.

속내를 잘 들어내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난관에 대처하는 전략적인 대응일 수도 있지만 상황파악도 명확히 하지 못하면서 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무대책으로 낭패를 당하기 쉽다. 대인 관계에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정한 태도를 취하므로 인해 큰 일을 망칠 수도 있고 비겁한 기회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할 때 정승화 참모총장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정 총장은 자신이 왜 그 곳에 와 있는지 총소리를 듣고도 우유부단했다. 모호성이나 결단성 보다 더 선행하는 요건은 상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그 인식이 명철하다면 모호이든 결단이든 모두 전략적 가치로 볼 수 있다.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은 전략이지만 모든 상황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전략이 아니다. 모호성 전략은 중동 전쟁의 중단을 위한 이란과 미국, 이스라엘의 협상에도 있었다. 삼성전자의 노사가 노동권과 경영권 대립하는 협상을 하는 데도 이용된다. 인간이 생존 경쟁을 하는 현장에도 애매모호성 전략이 사용된다. 살아 남기위해서 바보와 같이 정신 이상자 처럼 처세를 한다. 곤충도 천적이 나타나면 죽은 것처럼 흉내를 낸다. 생존을 위해 상가집 개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비 맞은 닭처럼 비틀거리기도 한다. 탈춤을 추는 광대는 자기를 감추며 세상을 풍자하기 위해서 동작을 한다.

말하지 않는 모호성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고 내면에 있는 처절한 진실을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말씀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의 속에는 엄청난 진리가 내재하고 있다. 전략적 침묵을 지키고 계신다. 세상에는 그래서 애매모호하게 살고있는 멀정한 사람이 있었다. 애절한 꿈을 품고 바보처럼 사는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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