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11-04 23:36:13

사우디-러시아-미국의 유가 전쟁

김 수 종
뉴스1 고문

안진우 기자 / 896호입력 : 2020년 04월 07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URL복사
지난 3월 초순 사우디와 러시아의 감산(減産)합의 실패로 유가가 폭락하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소비자에게 좋은 일이다. 휘발유 값이 내릴 것이다”라는 트위터 글을 날렸다. 그 후 “휘발유 값 하락은 여태 없었던 가장 큰 감세”라는 글을 올렸다.
3월 내내 이렇게 유가폭락을 방관하던 트럼프가 지난 2일 모하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미국 내 석유업자들이 망한다고 아우성치고 미국 관리들이 사우디와 러시아의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던 모양이다. 왕세자와 통화한 후 그는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모하마드 왕세자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석유감산에 합의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소식에 3일 유가는 크게 반등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트럼프의 허세와 함께 미국 대통령의 막강한 힘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사우디와 러시아 측에서 긍정적인 신호는 아직 없으니, 바이러스 사태로 정신없는 트럼프에게 유가폭락은 긴급한 과제다.
3월 초순 이후 유가가 광란의 내리막 춤을 추고 있다. 3월 말 세계 유가의 기준이 되는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값이 배럴당 20달러로 곤두박질했다. 아무리 퍼내도 모자랄 것만 같던 석유가 남아돌고 값은 펑펑 떨어진다. 지난 20년간 없던 일이다.
유가하락을 견인하는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 경제를 강타하면서 석유 수요가 격감하고, 미국의 셰일석유 생산으로 원유시장이 공급과잉 상태가 된 것이다.
바이러스 감염이 무섭고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이 엄격해지니 나들이 분위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집에 머물고 식당에 안 가니 가게들이 망하고, 해외여행이 뚝 끊기니 항공사와 여행사가 문 닫을 지경이다. 이런 일이 77억 인구가 사는 지구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중국의 산업시설 가동이 중단되면서 석유 소비가 크게 줄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의 석유 수요가 이미 감소하기 시작하던 차에 코로나 사태가 더해지자 중국의 경제활동과 에너지 소비가 타격을 받은 것이다.
바이러스 사태 이전에 유가하락의 큰 요인이 또 있었다. 미국의 ‘셰일혁명’에 의한 석유 공급과잉이다. 셰일 석유를 둘러싼 두 산유국 사우디와 러시아의 신경전이 복잡한 판에 바이러스 사태가 밀려들면서 ‘유가의 광란’을 촉발한 것이다.
2008년은 사우디를 종가로 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의 석유공급지배체제에 큰 변화가 일어난 해다.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의 석유소비가 급증하면서 한때 배럴당 145달러를 기록하는 등 세계는 고유가 시대를 예고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유가가 두 자리 수로 되돌아오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바로 이런 고유가에 힘입어 미국이 지하 1,000미터 깊이의 셰일(頁岩 혈암)층에 부존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퍼내는 ‘수압파쇄공법’이라는 신기술을 발전시켰다. 이 셰일혁명으로 미국은 50년 만에 사우디를 제치고 1위 산유국 지위를 탈환하고 OPEC의 석유패권을 약화시켰다. 셰일석유가 쏟아지면서 유가는 떨어지는 추세였다.
사우디와 러시아에게 오일머니는 국가재정에 절대적이다. 석유 값이 올라야 재정이 단단해진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유가 하락 방지를 위해 2016년 손을 잡았다. 사우디가 이끄는 OPEC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비(非)OPEC산유국들이 합쳐서 오펙플러스(OPEC+)를 구성했다. 일종의 가격카르텔이다. 사우디와 러시아의 합의로 오펙플러스는 석유 생산을 줄였고, 가격은 반등했다.
그러나 석유 감산은 사우디와 러시아에게는 일종의 딜레마다. 감산으로 유가가 오르면 미국의 셰일석유 생산조건이 좋아져서 셰일석유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고 미국의 입지가 강화된다. 미국을 견제하고 싶은 러시아는 이런 꼴을 못 본다. 그렇다고 감산을 하지 않으면 유가가 떨어져서 재정수입이 줄어든다. 또 공급과잉시대에 시장점유율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사우디와 러시아는 전략적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
바이러스 사태로 유가가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지난 3월초 오펙플러스의 감산협상이 비엔나에서 열렸다. 2016년의 오펙플러스 감산 합의가 지난 3월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실상 협상의 키는 사우디와 러시아가 쥐고 있었다. 사우디가 150만 배럴 추가 감산 제안을 들고 나왔다. 러시아는 이를 거부했다. 사우디는 준비라도 했다는 듯이 200백만 배럴 증산을 선언하고 4월 1일부터 유가를 대폭 인하하여 공급한다고 밝혔다. 이러자 유가는 폭락했고 그 영향은 일파만파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하락하던 세계 증시가 폭락하면서 세계경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이 상태가 계속되면 국가 재정이 고갈될 터이고, 미국은 셰일석유기업들이 도산할 것이다. ‘휘발유 값이 내려 소비자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하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모하마드 사우디 왕세자가 펼치던 유가 게임에 트럼프도 끼어든 것이다. 4월의 지구촌은 이 게임의 결과에 따라 출렁이게 될 것 같다.
유가 폭락은 미국 사우디 러시아만 아니라 전 세계 산유국과 한국과 같은 석유화학산업 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석유 관련 산업의 대량실업에 직면했다. 공급과잉과 수요격감의 이중 충격 사이에 포위되어 기업들이 죽게 생겼고 그 여파가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판이다.
한국은 지난 50년 동안 석유 값이 상승하면 한숨을, 하락하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번엔 과거와 같이 저유가를 구가할 여유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정부의 경제정책에는 중국처럼 저유가를 활용할 전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전 있는 정치적 리더십과 정책 당국자의 기량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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