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4-04-20 10:44:44

말(言)과 말(馬)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세명일보 기자 / 1022호입력 : 2020년 10월 22일
고분은 지하박물관이다. 도굴꾼의 발호로 부장품은 남아난 것이 없지만, 옛 무덤의 벽화는 그런대로 건재(建在)하다.
만주 지안현 통구 무용총의 수렵도를 보면 얼굴이 갸름하고 소골(모자)을 쓴 날랜 젊은 무사가 사냥감인 호랑이를 말을 타고 쫓고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호랑이는 달아나는 것이 달리는 수준이 아니라 쏜살같이 나르고 있다. 한일(一)자 모양이 되어 위기를 탈출하는 모습이다. 비호(飛虎)를 전력질주로 추격하는 엽사의 모습도 날렵하기만 하다. 죽느냐 사느냐 잡느냐 잡히느냐 극단적인 긴장의 순간을 벽화는 극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무술을 숭상하여 지방의 사립교육기관인 ‘경당’에서는 한문과 무술이 필수과목이었다. 나라에서도 고구려 최대명절인 삼월삼잗날(음력 3월 3일)에 왕이 친림하여 사냥대회를 열고 ‘국가의 무사’를 선발했다. 이날 출전한 무명의 무사들은 말을 타고 달려 사냥감을 가장 많이 잡은 사람이 무사로 선발되어 고구려 명장이 되곤 했다.
옛날 제왕에게 최대의 스포츠는 수렵(사냥)이었다. 사냥감인 달아나는 짐승을 추격하는 스릴도 그저 그만이고, 사냥감은 별미가 되어 입맛을 돋우어 어떤 임금은 날만 새면 궁궐을 떠나 사냥으로 날을 지새워 민정에 지장까지 초래했다. 요사이는 동물보호정신이 팽배(?)하여 옛날 사냥터에 골프가 대신 군림하고 있다. 고구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인 상무(尙武)의 나라였는데, 평지에서 펼쳐지는 평지야전에는 능수가 못되고 주특기가 수성전(守城戰)이었다. 당태종이 친정하여 안시성을 60여 일간 400회를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성주 양만춘은 거뜬히 이를 격퇴하고 당태종의 안구(?) 하나를 노획했다는 야사가 전해 오고 있다.
바보 온달을 명장 온달로 키운 것은 평강공주, 어릴 때 울보인 평강공주를 달래기 위해 부왕은 “너는 자꾸 울기만 하니 천상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 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여 평강공주의 머리엔 온달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채워 졌다.
이팔청춘이 되어 귀족인 상부 고씨의 아들과 혼담이 있었지만 어릴적부터 들은 부왕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 들여 왕이 정한 혼처를 반납하고 궁중에서 축출당한 평강공주는 우여곡절 끝에 온달과 댕기풀이를 하고 세계사적으로도 기록될 ‘바보와 공주’의 커플이 탄생하게 된다. 평강공주는 밤낮 없이 온달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말타기와 활쏘기의 스승이 된다. 개인과외를 하여 가장 성공한 여성이 평강공주인 셈이다. 궁중에서 말랐다고 싸게 파는 말을 온달에게 사오게 하여 다시 명마로 키운 것도 평강공주다. 평강공주는 사람보는 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말 고르는 혜안도 갖춘 것이다.
바보는 아무리 교육을 해도 천생 바보다. 구약성서 잠언엔 바보는 절구에 넣고 찧어도 바보의 껍질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왕년에 필자가 근무했던 학교에도 정박아 특수반이 있어 국립 특수교육원에 해당 학교장 연수를 위해 두 차례 입소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들은 놀라운 사실은 아무리 묘방을 처방해도 정신박약아는 평생 ‘정박아’로 남는단다.
그렇다면 바보 온달은 진짜 바보가 아니라 바보인 척한 참을 줄 아는 지자(智者)였다. 요사이도 평강공주 같은 슬기로운 여자가 이 땅에 태어났으면 한다. 온달은 을지문덕 다음가는 고구려의 걸출한 명장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49년 필자의 담임선생님은 수업시간 중에 일부 아동을 밥통이라고 왕따를 했는데, 그 아이는 바보는커녕 뒷날 불후의 천재가 되었다. 그 아이는 어른이 된 뒤에도 악명높은 교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끝내 그 방명(芳名)을 알 길이 없어 노트에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이름을 ‘김밥통선생님’이라고 적어 놨다고 했다.
교사는 평강공주 이상으로 사람(제자)을 잘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말(言)은 말 한필이 재산목록1호인 마부의 말(馬)보다 더 소중하다. 말을 잘 가려 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말은 우리 세상살이에 씨앗이 된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대로 된다. 진정한 인격자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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