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04-21 21:47:52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전 경운대 겸임교수 반병목
홈페이지담당자 기자 / 2269호입력 : 2026년 03월 10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URL복사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다. 가끔씩 메가박스에 가는데, 갈 때마다 지하 주차장에 차량은 몇 대 안 되고 극장 관람객도 10명 이내(아내와 둘 뿐일 때도 있었음)였는데 오늘은 2관 좌석이 거의 만석이 될 정도였다. 아내가 “‘서울의 봄’때보다 관객이 많은 것 같다“고 한다.

영화 줄거리는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단종과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 엄흥도와 광천골 마을 사람이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사실 정사(正史)와는 많이 다른데도 재미있게 각색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당대 공식 기록은 자결했다는 것이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돼 있다. 당시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이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실록에는 “단종 유배지인 영월에 사약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숙종실록에는 금부도사가 머뭇거리는 상황을 묘사한 뒤 “공생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에 피를 쏟고 죽었다”며 하인이 단종을 죽인 것으로 기록했다.

후대에 쓰인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을 모시고 있던 통인 하나가 활 줄에 긴 노끈을 이어 단종이 앉은 뒤로 가서 목에 걸고 창구멍으로 끈을 잡아당겼다”는 내용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의심이 가는 대목이 많으며 수많은 유추 해석 속에서 다른 기록과 영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숙종실록과 연려실기술 내용을 합쳐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것 같다.

중종실록에는 당시 “중종의 어명을 받은 우승지 신상은 단종의 무덤을 찾아 제사 지내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였다”, “고을 아전이었던 엄흥도라는 사람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이 자리에 장사를 치렀다”는 내용이 있다. 정조 때 간행된 국조인물고엔 엄흥도가 단종의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전한다.

화가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만류하는 데도 엄흥도가 말하기를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달게 여기겠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는 과정에서 엄흥도의 용기를 높게 사서 공조판서 벼슬과 충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조선 제 6대 왕위에 오른 단종은 어머니 현덕왕후가 그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문종마저 병으로 돌아가면서 너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왕의 무게를 짊어졌던 것이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는 피할 수 없는 권력 다툼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그 세력이 권력을 찬탈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것이다. 단종을 따르던 세력은 모두 숙청당했고, 결국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지로 향하게 된다.

먹고 살기 힘든 광천골 마을 촌장 엄흥도는 이웃 마을이 유배지로 되면서 주민의 삶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서는 청령포를 유배지로 선정되도록 관아에 호소 하게 되고 결국 유배지로 결정된다. 그러나 중앙에서 고관대작이 유배를 와 있는 동안에 물류가 교류되고 그 사람이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가면 연계된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그런 효과를 낼 수 없는 단종이 유배를 옴으로서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종이 유배지에서 마을 사람을 만나고, 글을 가르치며 주민과 동고동락하는 가운데서 측은지심에 의한 유대가 형성된다. 마을의 촌장 엄흥도는 왕이라는 지존의 자리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외롭고 힘든 유배 생활을 겪는 어린 단종을 불쌍히 여기며 그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유배된 단종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데, 단순히 슬프다 공허하다는 감정이 아닌, 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을 엿볼 수 있으며, 이 영화를 통해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권력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이 계유정난 이후 단종이 유배를 떠나는 최대 고비에서 시작했기에, ​어린 선왕 이홍위를 연기한 주인공 박지훈 배우는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위엄 있는 군주의 모습과 불안과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모든 의지를 잃은 듯한 사람처럼, 피골이 상접한 단종을 구현하고자 매 끼니 사과 한 쪽만 먹으며 두 달 반을 버티면서 15㎏을 감량했고, 입술도 목소리도 버석함을 내고 싶어 촬영 중에는 물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주인공 유해진 배우(엄흥도)는 충성과 두려움,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왕 앞에서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불안한 모습의 대비는 인물의 상황을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들어 준다. 영화 속에서 이홍위(박지훈)는 엄홍도(유해진)와 눈을 마주친 순간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한다.
친구들과 청령포를 비롯한 단종 유배지를 다녀 온지가 벌써 1년 반이 지난 것 같다. 돌아와서 신문에 두 차례에 걸쳐 기고도 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현장을 볼 때보다 영화의 현장이 더 을씨년스럽고 외로운 고도처럼 느껴지고 계속 눈물이 난다.

“왕이 되었지만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해 본적이 없다”는 17세 아이가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함께 밥상을 나누며 가까워지는 장면이 나온다. "밥 먹었니?"로 인사하는 한국인에게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생활 공동체, 끼니를 나눈다는 친밀함이다. 이어폰 꽂고 혼 밥하는 게 익숙해진 시대지만, 가끔은 떠들썩한 밥상이 그리워진다.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오는 그 소음, 대화와 웃음. 눈 마주침. 김이 오르는 밥 냄새,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등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밥이 아니라, 그 밥상머리에 함께 했던 사람들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엄흥도가 마을의 촌장이었건 관아의 호장이었건 간에 멸문지화를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단종의 시신을 묻어준 의리와 마을 사람들의 순수한 일상은 각자도생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이홍위가 던진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하는 의문을 다시 되새겨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

영월 부사가 “충신 충신 엄 충신아 내 못할 일 자네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가련하고 가련하다 한양가를 짓고 보니 슬픈 심회 나는 것이 칙량치 못할 리라(한양 오백년가)”고 한 말이 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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