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11-03 01:05:56

베이비부머 네 겹의 사간(엄창호作)

전 경운대 겸임교수 반병목
홈페이지담당자 기자 / 2281호입력 : 2026년 03월 29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URL복사

이 책은 근현대사의 그늘을 다루고 있다. 근대의 가치들이 다수의 염원과는 달리 특정 세력의 이익에 복무해왔다. 그 가치들이 베이비붐 세대의 삶 속에 어떻게 스며들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살피는데, 근대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속에서 시대와 한 개인의 삶은 어떻게 교차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도쿄 대를 중퇴한 뒤 일본의 대표 저술가가 된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우선 도쿄대학 법학부에 입학하는 대다수 학생은 주입식 교육에 순응하는 두뇌 구조를 지녔다고 전제한다. 그들 대부분이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내용을 충실하게 머릿속에 입력했다가 시험을 볼 때 그것을 출력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수험 경쟁을 해쳐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한 마디로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생을 ‘찾잔’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토론 형식의 강의가 매우 적어서 많은 학생이 주입식 교육만 받다가 학창 시절을 끝낸다. 즉 대다수의 학생은 대형 강의실에 배열된 ‘찻잔’인 상태로 교수가 주전자로 부어주는 대로 받아 들이며 학창 시절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서울법대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일본에는 ‘도쿄대학 법학부’가 있다. 전국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학생이 입학한다는 점이나 졸업생이 정, 관. 재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판박이처럼 닮았다.

또 이 책에서 소개하는 도쿄대학 법학부 전 학부장의 축사도 흥미롭다 주간 아사히1998년 4월 17일자에 실렸다. “최근 들어 나는 일본의 학생들에게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유치한 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중략) 일본사회는 현재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추악한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세기말의 참상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마치 진흙탕 같은 부패, 타락, 부정, 불상사에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이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쯤 되면 서울법대와 도쿄 대학 법학부는 이란성 쌍둥이 같다. 문제는 과도한 경쟁교육과 비뚤어진 능력주의, 승자독식 시장주의에 있다. 이런 사고가 대입 배치표 맨 꼭대기에 있는 ‘서울법대’에 대한 선망과 우상화로 이어졌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많은 서울 법대 출신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헌신을 철저히 무시하고 공적 권한을 활용해 오로지 자신과 자파의 사리사욕만 추구한다는 점이다.

공동체가 선망하는 대상이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역설! 이 결과는 해방 후 80년간 우리 공동체가 받은 누적된 성적일 수도 있다. 김누리교수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에서 이렇게 분석한다. “한국의 교육은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만드는 교육입니다. 승자는 모든 것을 독식하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교실이 전쟁터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전쟁터에서 승자는 오만함을, 패자는 열등감을 내면화합니다. 이것이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서 사회적 심리의 바탕을 이룹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전쟁터와 다름없는 우리의 교육현실에서 배태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이 실패한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닐까? 공부 잘해서 서울법대 가고, 서울법대 가서 고시 합격하고 그런 다음 판검사나 국회의원이 되고, 그래서 결국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떵떵거리며 사는 게 가장 큰 성공이라고 배운 사람이 많다. 폭 그렇게 되지 못했다면 그 비슷하게라도 되는 것이, 그마져도 안 되면 혈연 지연 학원을 동원해 그런 지인을 알고지내는 것이 작은 성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을 무작정 추종하거나 동조하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 수 십년간 우리 사회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나 그 동조 세력이 주도해 왔다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고 문화강국이 되었다고 자부하지만, 그 이면에는 학교가 빚어낸 왜곡된 성공 신화가 놓여 있다. 서울법대를 정점으로 한 학벌주의와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들을 길러냈지만, 그들이 결국 실패한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학교가 만든 성공신화가 실패의 굴레가 된 것은 아닐까? 라고 저자는 한탄한다.

몇 해 전 어느 진보 단체는 ‘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한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진보가 어쩌면 하나의 착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란 역사가 반드시 진보한다는 굳은 믿음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역사가 진보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역사는 도돌이표처럼 순환하며 반복되거나 아예 퇴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진보 사관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던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란 구절이 나온다.

이 글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특정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문장들은 인간이 만든 모든 사회와 문명에 내재된 본질적 모순을 관통한다. 진보와 퇴보, 희망과 절망, 지혜와 어리석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간 역사의 속성이다.

이 글이 1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문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삶의 모순과 불안정성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내가 베이비붐 세대의 일원으로 살아온 지난 육십여 년 역시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생략)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라고.

이 책의 제목은 ‘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다. ‘네 겹의 시간’은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은 앞서 말한 ‘네 개의 창’, 즉 장소·개념·사람·사물이라는 네 가지 범주를 뜻한다. 더 깊게는 네 개의 시대, 즉 농경시대·산업시대·정보화시대·AI시대를 의미한다. 나 역시 베이비부머들과 함께 이 네 시대를 모두 경험하며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다. 때로 남루했을지언정 더러 영광스럽기도 했던 그 세월을 버텨낸 데 대해 서로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다.

또 후대들에게는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속에서 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고, 오늘의 조건과 내일의 과제를 알고 더 지혜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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