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이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보름달이 차오르면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가는 국민 대이동 행렬을 이룬다. 자동차가 길을 메우고 기차역과 공항이 전쟁터가 된다. 매표 전쟁, 귀성 전쟁, 택배 전쟁이 벌어진다. 오랜만에 부모를 만나고 형제자매와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추석은 그렇게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날이다. 추석(秋夕)은 글자 그대로 ‘가을 저녁’이라는 뜻이다. 가을 한가운데에 있는 큰 명절이라는 의미에서 한가위·가배(嘉俳), 중추절(仲秋節)이라고도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고 하늘과 조상에게 감사하는 때였다.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을 마련해 차례를 지내며 성묘를 했다. 강강술래 같은 공동체 놀이도 즐겼다. 그러나 추석의 가장 중요한 풍습은 음식이나 놀이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차례상 앞에서 조상을 생각하고, 밥상 앞에서 가족의 안부를 묻는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의 얼굴을 바라본다. 때로는 지난날의 서운함을 풀고, 때로는 힘든 삶을 서로 위로한다. 추석은 그래서 ‘만남의 명절’이다. 소통하고, 화목하고, 공감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충전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올해 추석을 맞는 우리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다.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의 포성이 멈추지 않고 있다. 중동의 무력 충돌은 국제사회의 불안을 키우고 있고, 북한의 미사일과 군사적 긴장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나라 안도 총소리는 없지만 전쟁 중이다.
정치권에서는 서로 다른 진영과 진영이 치열하게 맞서고, 당내에서도 주도권을 둘러싼 정쟁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여야의 전투가 국회 안팎에서 이어지면서 국민은 불안하다. 이 정권 지지도는 왜 내려가는가.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북의 도발을 말릴 수가 없는가. 미국은 믿어도 되는가. 양극화는 왜 심해지는가. 자살율은 왜 높아지는가. 국민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정치에서 경쟁은 필요하다. 서로 다른 의견의 대립도 민주주의의 당연한 모습이다. 하지만 경쟁이 증오가 되고, 비판이 적대가 되며, 상대방을 무조건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생결단 전투가 된다면 정치의 본래 목적은 소멸되고 만다. 정치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국민이 정치 때문에 불안해하고 가족과 이웃이 정치 때문에 갈라진다면 다시 정치의 목적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추석 밥상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차례를 지내고 밥을 먹다가 정치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가 옳으냐. 누가 나라를 잘못 이끌었느냐. 어느 편이 맞느냐.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논쟁판이 벌어진다. 결국 오랜만의 가족 만남이 정치적 전쟁터가 된다. 밖에서는 세계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한반도에는 군사적 긴장이 흐르고, 집에서는 부동산과 물가 때문에 근심이 높아진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 가져올 일자리와 산업의 변화까지 겹친다. 가족의 미래도, 국가의 미래도, 세계의 미래도 불확실해 보인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며,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부처님 자비를 기원할 것이며, 조상을 섬기는 사람은 차례상 앞에서 조상의 음덕을 빌 것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가족의 사랑과 인간의 양심에서 위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평화의 출발점은 그렇게 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사람에게 있다.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말하면서 가족과 싸운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형제의 생각 하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공동체의 미래를 말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제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제도다. 그래서 추석은 정치적 승패를 확인하는 날이 아니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날이다. 추석은 전쟁하는 날이 아니며 평화를 만드는 날이다.
차례상 앞에서는 조상을 생각하고, 밥상 앞에서는 가족을 생각하자.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가족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상대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먼저 상대의 말을 들어보자. 생각은 달라도 가족일 수 있고, 정치적 입장은 달라도 친구일 수 있으며, 의견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는 이웃일 수 있다. 보름달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여당의 달도 야당의 달도 아니다. 진보의 달도 보수의 달도 아니다. 부자의 달도 가난한 사람의 달도 아니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똑같이 빛난다. 그러기에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며 우리도 소원을 하나씩 빌어보자.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하소서.” “우리 사회가 서로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한반도에 전쟁이 없게 하소서.” “세계에 평화가 오게 하소서." 중요한 것은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다.
올 추석만큼은 정쟁의 목소리보다 가족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으면 했다. 분노의 말보다 덕담이 많았으면 했다. 내가 옳다는 말보다 당신 생각은 그렇군요라는 말이 많았으면 했다. 세계의 전쟁을 우리가 당장 멈출 수는 없다. 국제정세를 하루 아침에 바꿀 수도 없다. 정치권 전쟁도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 밥상에서 시작되는 작은 평화는 내가 만들 수 있다. 한 마디 양보하고, 한 번 더 웃고, 한 번 더 들어주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가족의 평화가 되고, 이웃의 평화가 되고, 사회의 평화로 이어진다. 민족 명절 추석은 원래 전쟁의 날이 아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조상을 기리며, 함께 밥을 먹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 날이다.
그러니 추석만큼은 싸움보다 화해를, 대립보다 소통을, 분노보다 공감을 선택하면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만 같아라는 추석 명절 높은 보름달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은 밥상에서 만큼은 정치도 정쟁도 잠시 내려놓자. 그리고 서로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자.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건강하세요.” “내년에도 함께 잘 해봅시다.” 그 말이면 충분하다. 추석전쟁을 추석평화(大和)로 바꾸자. 이제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롭게 살기로 하자. 쟁반같이 둥근 보름달은 오늘도 말없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우리 가정의 추석 밥상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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