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09-29 08:00:29

'기억전쟁' 죽은 자의 진실을 지켜야한다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김경태 기자 / 2399호입력 : 2026년 09월 28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URL복사

죽은 자는 반론할 수 없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자신이 죄인이었는지 조차 말할 수 없다. 살아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할 뿐이다. 그래서 죽은 자에게 가해지는 가장 잔인한 폭력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을 부정하고, , 책임을 뒤집고, 마침내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또 다른 전쟁, 기억전쟁이다. 기억전쟁이란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가를 놓고 국가, 민족, 계급,·인종, 젠더, 세대와 정치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가 말한 ‘기억의 장소’처럼 역사적 기억은 기념관과 교과서, 추모식과 기념일을 통해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러나 기억은 순수하지 않다. 권력과 이념이 개입하면 기억은 선택된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기억하고 불리한 것은 잊는다. 피해자의 기억은 과장이라고 하고, 가해자의 기억은 당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피해 사실을 부정하는 방법도 교묘하다. 그런 일은 없었다는 직접 부정, 피해자가 자초했다는 책임 전가, 숫자가 정확하지 않으니 사건 자체도 의심스럽다는 실증을 가장한 부정, 그리고 가장 조용한 방법인 망각이다.

기억전쟁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동맹국의 협력자들은 유럽의 유대인 약 600만 명을 학살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은 나치 문서와 전후 인구통계, 수용소 기록 등을 종합해 약 600만 명이라는 숫자를 제시한다. 그런데도 기억전쟁은 계속됐다. 600만 명은 과장, 가스실은 거짓, 유대인들이 전후 보상과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만든 조작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홀로코스트 부정의 대표적인 형태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해자들이 학살의 흔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나치 당국은 집단 학살의 증거를 파괴하고, 시신과 집단 매장지의 흔적까지 없애려 했다. 즉 사람을 죽인 뒤 증거를 죽이고, 증거를 죽인 뒤 기억까지 죽이려 한 것이다.

난징 비극도 기억전쟁이 됐다 1937년 일본군의 난징 점령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 역시 숫자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된다. 중국 정부와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30만 명이라는 숫자를 제시해 왔다. 반면 역사학계에서는 자료와 산정범위에 따라 희생자 수를 다르게 계산한다. 옥스퍼드대학의 연구자료는 전후 재판과 매장기록 등을 바탕으로 10만 명에서 30만 명까지로 추정했다. 일본군 자료와 중국, 서양 측 기록을 보면 수만 명 이상의 집단 처형과 민간인 학살, 성폭력이 있었다고 확인된다. 희생자가 10만 명, 20만 명인, 30만 명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학이다. 그러나 숫자가 다르니 학살도 없었다고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강제동원도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규모는 자료와 산정 방식에 따라 다르다. 한국사 자료는 일본으로 동원된 규모를 80만~120만 명, 다른 연구에서는 약 15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조선 내부를 포함한 전체 노무 동원 규모는 약 600만~687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의 2002년 국회 답변에서도 조선인 징용자 관련 명부를 한국 정부에 전달한 사실과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상황에 놓였고 큰 고통을 겪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억전쟁의 핵심이 숫자에 대한 공방이 될 수 없다. 누가 동원했으며, 어떤 법과 행정체계가 작용을 했고, 어떤 환경에서 일했으며, 임금과 귀환은 어떻게 처리됐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국가 기록원에는 일본 정부와 기업 등에서 작성한 조선인 피해자 관련 명부가 544권과 마이크로필름 26롤, 약 48만 명분에 이른다. 한국의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관련 기관은 연구자들의 추정이 2만 명에서 40만 명까지 된다고 말한다. 1993년 고노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당시 군의 요청에 의해 위안소의 설치 관리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구체적인 근거가 부족해 전체 인원을 확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숫자의 불투명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수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있다. 그렇다면 승자의 기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진실은 어떻게 되는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사람,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 전쟁에서 패배해 기록의 주도권을 잃은 사람의 진실은 누가 지켜야 하는가.

강자는 기록할 힘을 가지고 있다. 강자는 쿠데타를 혁명으로 혁명을 반란으로 부를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을 충신으로 산 사람을 역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폭력을 질서라고 부르고 상대방의 저항을 범죄라고 부를 수도 있다. 기억 전쟁은 역사를 비판해야 한다. 가해자의 기록과 피해자의 증언을 함께 보고, 국가의 공식 문서와 개인의 기록을 대조해야 한다. 숫자가 왜 다른지, 기록이 왜 없는지 물어야 한다. 기억의 목적은 복수가 아니라 재발 방지다. 오늘날 기억전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한·일, 한·중, 한·미, 남북관계에서도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정치와 외교에 영향을 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역시 전쟁이 끝난 뒤 영토와 배상 문제뿐 아니라 기억전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그러나 기억전쟁의 목적이 증오의 세습이나 보복의 상속이 돼서는 안 된다. 기억은 복수가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것이다.

기억전쟁은 국가 간 관계뿐 아니라 국내에도 진행 중이다. 8.15와 6.25, 5.16, 12 12, 5.18, 12.3 등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 전쟁이 이념과 진영이 대립하면서 총소리 없는 전투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도 있다. 부부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아느냐며 기억전쟁을 한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친구 사이에도 기억전쟁은 벌어진다. 여기서도 필요한 것은 승자가 아니다.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며,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완벽하게 바로 세우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가능하다. 죽은 자는 반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산 자에게 책임이 있다.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을 왜곡하지 않고, 확인된 사실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 그것이 죽은 자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다.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과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다.같은 과오를 미래에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기억전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어느 국가의 체면도, 어느 민족의 자존심도, 어느 이념의 승리도 아니다. 기록할 힘조차 갖지 못했던 죽은 자들의 피맺힌 진실이다. 죽은 자는 소리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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