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11-08 07:51:49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

전 경운대 겸임교수 반병목
홈페이지담당자 기자 / 2423호입력 : 2026년 11월 08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URL복사

화제를 모으고 있는 ‘여전히 찬란하게’가 극장 상영작 중 평점 1위를 기록하며 관객 호평을 얻고 있다. 이 영화는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에 공식 초청되는 등 화제작으로 떠오른 바 있다..

2025년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끝으로 연기를 그만두고 은퇴하려던 김혜자는 조용히 남은 시간을 보내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송일곤 감독은 이 역할에 김혜자만이 낼 수 있는 감정의 깊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직접 편지를 쓰고, 몇 번이고 찾아가 출연을 부탁했다고 한다. 김혜자가 출연을 결정하게 만든 건 화려한 배역도, 흥행 기대도 아닌 편지 속 한 문장, 편지에 담긴 순옥이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인데, “순옥은 울지 않습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한 시간이 여전히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믿는 사람입니다."

김혜자는 친필 편지를 통해 이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고 전했다. 소녀들이 겪은 고통만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고 싶어 했는지도 함께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연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65년 연기 인생을 마무리하려던 배우를 돌려세운 것은 눈물이 아니었고, 끝까지 울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 전히 찬란하게’ 청춘의 기억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우정의 의미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풀어내는데, 순옥(김혜자 분)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함께한 단짝 친구 정임(차미경 분)과의 60년 만의 재회를 통해 세월이 지나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돌아보면서 시작된다.

1942년, 일제강점기의 경상도 산골 마을. 열일곱 살 순옥과 정임은 둘도 없는 단짝이다. 정임은 빼어난 노래 실력을 지녔고, 순옥은 친구 곁에서 그 꿈을 누구보다 응원하며 함께 꿈을 키워간다. 두 사람은 언젠가 서울에 가서 노래하고 돈도 벌며 자신들의 삶을 펼쳐나가겠다는 소망을 품고, 가난한 환경과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함께 웃고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은 가난하고 고단한 하루하루였지만 두 소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서로의 팔에 둘만의 증표를 새기며 영원한 우정을 약속한 두 사람.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대의 현실은 그들의 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데, 마을에는 공장 취직을 미끼로 어린 여성들을 데려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진다. 두 소녀 역시 피할 수 없는 위협 앞에 놓이지만, 그 속에서도 두 사람의 우정은 이어져 간다. 그 평범한 꿈을 부순 것은 일제강점기의 폭력이었다.

피신해 있던 산골 집에서 정임이 발견돼 려감으로써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영화는 수십 년 뒤로 건너가, 할머니가 된 순옥이 오랜 친구 정임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순옥은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을 함께한 정임을 다시 찾아내고, 두 사람은 약 60년 만에 재회한다. 이제 노년이 된 두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꿈꾸었던 노래자랑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하는데, 하지만 설렘도 잠시, 순옥은 정임이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꿈꾸었는지, 순옥과 함께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조차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정임이 서울 노래자랑 가는 것도 기억 못한 체 사라지고 순옥은 정임을 찾아 헤맨다. 이 영화는 젊은 시절 열일곱 소녀들의 일상과 우정을 보여주면서, 그들에게도 저마다의 미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면 빼앗긴 것의 목록도 달라진다.

가수가 되고 싶던 꿈,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시간,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까지 모두 빼앗겼다는 것이 보인다. 역사의 비극은 가해자와 피해자, 두 편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는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제도와 권력이 있었고, 거기에 협력한 사람과 위험을 알고도 입을 닫은 사람이 있었으며, 누군가를 지키려고 움직인 사람도 함께 있었다. 이런 점은 오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약한 사람에게 부당한 일이 벌어질 때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하지만 피해를 겪은 사람들 삶이 오직 고통으로만 이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친구와 나눈 웃음이 있었고,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미래가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기존 위안부 영화와 다른 점은 피해자를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피해자들을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로, 인권침해 피해자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그들이 어떤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누구와 깔깔대며 웃었는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순옥과 정임은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노래를 부르고 서울에 가는 일을 꿈꾸며, 자신들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넓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다.

영화는 이런 범한 소망이 시대의 폭력에 의해 위협받는 과정을 보여주고, 관객은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뿐 아니라, 원래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었는지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이런 근은 역사적 비극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역사는 거대한 사건과 연도로 기록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에게는 각자 일상과 관계, 미래에 대한 기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두 소녀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지 올해로 35년이 됐다. 그 용기 있는 고백이 오랜 침묵을 깨뜨렸지만, 지금은 직접 증언할 수 있는 분이 거의 남지 않았다. 올해 8월 기준으로 정부에 공식 등록된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5명뿐이다. 한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지만, 누군가 듣고 적고 이야기로 옮기면 공동체의 역사로 남을 수 있다.

두 친구가 함께했던 시간은 시대의 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지만, 그 시절 웃음과 약속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친구와의 시간을 끝까지 붙잡으려는 순옥의 모습에서, 사라져 가는 피해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기억해 나갈 것인가를 묻는 것 같다. 거대한 사건보다 또래 소녀들 꿈과 우정을 먼저 만나면, 그들이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내일을 꿈꾸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는 일,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고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우리 몫으로 남아 있다. 특히 역사를 교과서로만 접한 젊은 세대에게는 새로운 공감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건넬 것인가? 또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의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조용히 되물어 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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