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2026-06-09 19:22:48

시인의 조건(하)

김 시 종 시인·자문위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세명일보 기자 / 입력 : 2019년 06월 26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네이버블로그 URL복사

시인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데 선두주자가 되어야 한다. 어떠한 형태로든 독재자나 폭군을 예찬하는 곡필을 농해선 안 된다. 시필을 꺾을망정, 시필을 굽혀선 안 된다. 언제나 어디서나 정의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고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전사한 바이런처럼 자유를 위한 순교자가 되어야 하고 순교를 못할 경우 최소한 순교할 각오라도 하여야 한다.
시인은 밝은 눈을 지녀야 한다. 세계와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고 미래상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 자기와 민족과 인류의 장래를 투시할 줄 알아야 한다. 근시안은 페인트공은 될 수 있어도 시인으론 어울리지 않는다.
시인은 진실해야 한다. 남에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해야 한다. 동양의 철인 공자도 시를 일러 思無邪라고 하지 않았던가? 잡것이 섞이면 순금이 될 수 없듯이 시에도 비진실이 도사려선 안 된다.
시인은 폭넓은 인생을 경험해야 한다. 시인이 겪은 어린 시절의 고생은 영롱한 눈물 흘리는 법을 가르쳐준다. 초년 고생은 초설같이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이 앓는 모진 병은 단순한 면역성만 기르는 게 아니라 인생의 참된 뜻을 더욱 깊이 아로 새겨준다. 아파 본 사람이 아니면 남이 앓는 콜레라가 자기의 고뿔보다 못한 것이다. 거센 파도가 진주조개의 진주를 더욱 단단하게 하듯이 고난은 인생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인도해 주는 훌륭한 길잡이인 것이다.
시인은 편견이 없어야 한다. 사물이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사팔뜨기에겐 바른 물체마저도 비뚤게 보이는 것이다. 색안경은 어떠한 형태이든 시인의 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색안경은 용접공의 눈에는 어울릴망정 시인의 눈에는 부적격이다. 세상에는 편견이 있는 사람은 편견이 있는 만큼 불행한 사람이다. 시인이란 남의 시를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라면 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옛날 유대의 어떤 농부가 남의 밭에 보물이 묻힌 것을 혼자 알고 자기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들인 것처럼 시인은 시를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분신인 시도 애지중지 다뤄야 하지만 자기 시가 소중 한만큼 남의 시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를 혁신하고 연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산정에 꽂힌 낡은 기(旗)로 만족하지 말고 새 지평선의 기수가 되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시인은 과거의 시인이지 현재의 시인은 아닌 것이다.
시인은 무한한 실험자다. 에디슨이 실험에 열중하다 달걀로 착각하고 시계를 삶은 것이 어찌 에디슨만의 일이겠는가? 단순하던 서정시가 오늘의 시로 변모, 혁신하게 된 것도 쉴 줄 모르는 시인의 실험정신 덕분인 것이다.
시인의 마음은 공명정대해야 한다. 정확한 평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도당의 私益을 옹호하고 패거리의 안보를 위해 평필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은 미친 자의 손에 든 칼보다 더 인류에게 큰 해악을 가져다준다.
시인은 예리한 감수성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감정이 마목처럼 마비된 사람은 시인의 반열에 이단이다. 여린 현악기 줄보다 더한 떨림을 일으키고, 칼날보다 날을 세워야 하는 것이 시인의 감수성이다. 슬퍼도 남보다 먼저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진정한 눈물은 남몰래 가슴으로 우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시를 처세의 방편으로 삼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대용물로 타락시켜선 안 된다. 시가 도구로 격하됐을 때, 시인은 시보다 더 천한 대접을 받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시인은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여야 한다. 시인이 되기에 앞서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러운 그릇엔 깨끗한 물을 담아도 물이 더러워진다. 시인의 마음이란 그릇에 담긴 정서의 물이다. 흐린 물엔 맑은 하늘도 흐리게 비쳐지는 것이다.
시인이란 영원한 이방인이다. 자기의 마을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늘 낯설어 한다. 역마살 때문만도 아니지만 시인은 한군데 안착하지 못하고 늘 길을 떠난다. 늘 새로운 출발이 있을 뿐 도착이란 있을 수 없는 시지포스 신화의 주인으로 永罰을 스스로 즐겨 감수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잠수함 맨 밑층의 토끼처럼 혼탁한 공기에 제일 예리하지만 노아방주의 비둘기처럼 인류에게 기쁜 메시지를 가장 먼저 전달하는 자랑스런 존재이다. 이상의 조건을 고루 갖춘 시인 만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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